100년 뒤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쉽게 상상하기 힘들다. “1900년으로 돌아가 2000년의 모습을 예측해주세요”라고 묻는 것과 동일하지 않을까. 이정도면 예측이 아니라 상상에 가깝다. 1904년 동력 비행에 성공한 라이트 형제에게 100년 뒤 최대 이륙중량 560톤에 달하는 2층 여객기가 등장한다고 말하면 사기꾼 소리를 들을게 뻔하다.
하지만 당차게 한 세기 뒤를 예측한 자동차 브랜드가 있다. 그리고 이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미학을 제시하고 시각적인 형태로 풀어낸 콘셉트카까지 공개했다. 급격한 기술 발전, 환경 파괴, 전쟁 등 수많은 변수가 난무하는 세상 속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 자체가 자칫 오만해 보이지만, 오늘의 주인공인 이 브랜드는 개의치 않았다. 럭셔리 자동차 시장을 선도하는 롤스로이스Rolls Royce다.
2016년 롤스로이스가 속한 BMW 그룹은 창립 100주년을 맞이했다. 그리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다종다양한 콘셉트카를 공개했는데, 롤스로이스 역시 ‘103EX 비전 넥스트 100’이라는 차량을 공개했다. 모델명 그대로 회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100년의 로드맵을 품은 차량이다.
망망대해를 항해하기 위해 올바른 방향을 잡아주는 나침반이 필수적이 듯, 롤스로이스 역시 먼 미래를 예측하기 앞서 확고한 기준점이 필요했다. 기반과 기둥을 단단하게 다져야 100년이라는 시간을 쌓아도 무너지지 않을 터.
그래서 당시 롤스로이스 디자인을 이끌던 자일스 테일러Giles Taylor 수석 디자이너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향후 100년 동안 럭셔리를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을까?”. 현재 롤스로이스가 추구하는 럭셔리의 개념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발전 방향을 묻는 질문이었다.
이어 구체적인 답을 얻기 위해 두 개의 하위질문을 던졌다. “롤스로이스 고객은 향후 수십 년 동안 회사에 무엇을 기대할까?”와 “그렇다면 롤스로이스는 고객의 기대를 어떻게 충족할 수 있는가?”였다.
롤스로이스는 이 과정 속에서 앞으로 럭셔리가 갖춰야 할 4가지 핵심 가치를 도출했다. 100년간 펼쳐질 새로운 럭셔리를 떠받칠 단단한 4개의 기둥을 마련한 것인데, ‘개인 비전’ ‘수월한 여정’ ‘장엄한 안식처’ ‘장엄한 도착’이 바로 그것이었다.
개인 비전The Personal Vision부터 살펴보자. 개인 비전은 말 그대로 각 개인의 비전을 뜻한다. 현재 롤스로이스는 비스포크Bespoke 프로그램을 가장 활발히 운영하는 자동차 브랜드다. 고객이 원하는대로 차체 색상은 물론 내부 장식까지 새롭게 바꾼다. 세상에 단 한대 뿐인 롤스로이스를 제공하는 것.
그리고 향후 자동차 럭셔리 시장은 고객 개인의 영향력이 더욱 확대될 것이라 내다봤다. 단지 디자이너가 정한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소극적인 변화가 아닌 차량 개발 단계에서부터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질 것이라 예측했다. 외관의 크기는 물론 실루엣까지 고객의 비전에 맞춰 설계하는 것. 롤스로이스는 “미래에는 고객이 자신의 ‘개념’을 의뢰할 것”이라며 비스포크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 전망했다.
다음은 장엄한 도착The Grand Arrival이다. 이 개념은 대관식의 현장을 상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대관식은 유럽에서 임금이 즉위한 뒤 처음으로 왕관을 써서 왕위에 올랐음을 일반에게 널리 알리는 의식이다. 수많은 인파가 오직 한 명을 위해 모여들었고 임금은 자신의 직위를 상징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고급 마차와 함께 등장했다. 이때 마차는 단순 이동 수단이 아닌 탑승한 자의 중요성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메개체인 것.
103EX 비전 넥스트 100은 현대판 마차라고 할 수 있다. 롤스로이스는 탑승자가 마치 과거 임금이 된 듯 위풍당당한 아우라를 느낄 수 있도록 차량을 디자인하고자 했으며, 특히 외관에 이런 정신을 투영했다. 차량의 전장은 5.9미터에 이른다. 판테온 신전을 형상화한 그릴은 크롬으로 덮여있으며, 이는 헤드라이트를 지나 보닛을 따라 측면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리어 쿼터 패널을 통해 뒤쪽까지 흐르며 하나의 유려한 라인을 만들어낸다. 일반적인 캐릭터 라인처럼 패널에 엣지를 입혀 선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 고급 크롬을 얹어 적층 구조를 만들어낸 것이다.
롤스로이스는 현재도 활발히 사용 중인 투톤 컬러를 확대 적용했다. 보닛부터 캐노피까지 전 영역을 어둡게 칠해 탑승자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했다. 나머지 차체는 실크를 연상시키는 크리스털 워터Crystal Water를 입혀 극적인 대비 효과를 만들어냈다.
특히 롤스로이스가 이 색상을 사용한 이유가 있는데, 거대한 차체에도 불구하고 가볍다는 느낌을 연출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전면 스트럿과 암을 외부로 노출해 앞바퀴와 차체가 분리되는 구조를 고안했다. 독특한 이중 구조와 가벼움을 강조하는 밝은 색상이 합을 이뤄 차량이 운행 중이거나 정차해도 항상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분위기를 전달한다.
28인치에 달하는 거대한 앞 바퀴에는 손수 제작한 65개의 개별 알루미늄 조각이 얹어졌다. 차량을 전면에서 보면 마치 쌍동선이 연상되며, 측면에서 바라볼 때는 바퀴의 힘을 움직이는 외륜선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롤스로이스는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외관 설계를 통해 차량을 하나의 고급 요트로 탈바꿈시켰다. 103EX 비전 넥스트 100을 자동차 디자인의 오뜨 꾸뛰르라고 소개한 롤스로이스의 자신감이 허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장엄한 도착이 외관에 관한 키워드였다면 장엄한 안식처Grand Sanctuary는 내관을 향한다. 차량의 외관은 관람자에게 초점이 맞춰졌다. 하지만 고객이 실질적으로 머무는 실내는 롤스로이스만의 럭셔리 경험과 직결된다.
롤스로이스는 이를 가장 귀하고 현대적인 재료와 함께 풀어냈다. 마카사 목재 패널로 실내 기초를 구성하고 실크 소재의 소파와 런던에서 직조한 최고급 원오프 딥 파일 아이보리 울 카페트를 바닥에 배치해 호화로운 실내를 연출했다.
특히 실크 소파는 2015년 기획된 팬텀 세레니티Phantom Serenity 프로젝트에 영감받아 디자인한 것으로, 아름다운 질감은 물론 우아한 상아빛을 자랑한다. 실내 전면에는 스티어링 휠 대신 거대한 스크인을 얹었고 상단은 아날로그 시계로 장식했다. 과거와 미래가 한 공간 안에서 훌륭한 조화를 이룬다. 자일스 테일러 수석 디자이너는 “롤스로이스 디자인은 우아함의 전형이며, 이런 우아함은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한 단순한 디자인을 통해 구현된다”고 밝혔다.
마지막은 수월한 여정The Effortless Journey이다. 이 키워드가 품고 있는 핵심은 간단하다. 탑승자가 편안한 휴식을 취하며 이동할 수 있는 것. 이를 위해 롤스로이스는 ‘엘레노어Eleanor’라는 인공지능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는 탑승자의 스케줄을 살피고 목적지까지 차량을 안전하게 인도한다. 가상의 비서이자 운전자 역할을 한다.
사실 엘레노어는 롤스로이스의 상징인 환희의 여신상Spirit of Ecstasy의 모티브가 된 여성이다. 1911년 Charles Sykes가 Eleanor Thornton의 형상을 조각으로 옮겼고 롤스로이스가 이를 전 차종에 적용하며 브랜드를 대표하는 시그니처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103EX 비전 넥스트 100에서 엘레노어를 단지 브랜드를 상징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을 넘어 미래 럭셔리의 골자를 이루는 핵심 가치로 탈바꿈시켰다. 첨단 디지털 기술을 통해 정적인 브랜드 유산에 동적인 생명력을 불어 넣은 것이다.
롤스로이스는 이미 럭셔리 자동차 업계의 정점에 올라섰지만 거만하지 않았다. 현재 전개하고 있는 럭셔리의 방향성이 미래에도 통할 것이라는 교만함은 103EX 비전 넥스트 100에서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처음으로 돌아가 럭셔리의 개념을 재정립하는 수고스러움을 자처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은 내실은 갖추지 않은 채 화려한 외실만 쫓는 행태를 꼬집는다. 롤스로이스는 조용하다. 정숙한 주행에도 불구하고 도로 위 엄청난 존재감을 발휘하며 시선을 잡아끈다. 롤스로이스의 과묵함은 조용한 엔진, 높은 체결성의 부품과 차체를 만드는 기술력 외에도 럭셔리의 본질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노력이 축적된 단단한 내실의 결과가 아닐까. ‘롤스로이스’라는 수레는 앞으로 더욱 무거워질 예정이다.
글 / DESIGN ANATOMY
문의 / designanatomy@naver.com
© 디자인해부학,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