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벤틀리는 제네바 모터쇼에서 새로운 SUV 컨셉을 발표했습니다. 바로 벤틀리 ‘EXP 9 F’입니다. 벤틀리는 이 컨셉을 다듬어 4년 뒤인 2016년 벤테이가를 발표하기도 했는데요, 벤테이가의 모태가 되는 모델이 바로 EXP 9 F인 것입니다.

발표와 함께 벤틀리의 전 회장이었던 ‘볼프강 뒤르 하이머(Wolfgang Dürheimer)’는 ‘벤틀리 고객은 이미 많은 SUV를 소유하고 있다.”라며 “우리는 EXP 9 F 컨셉을 통해 그들이 이러한 차량에 기대하는 점들을 충족시키고 나아가 그 기대를 능가하려 한다.”라고 자신감을 드러냈습니다.

디자이너들에게 있어 EXP 9 F 프로젝트는 완전히 새로운 벤틀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들은 프로젝트 시작부터 명확한 비전을 가지고 시작했는데, 과거 루크 동커볼케가 벤틀리 수석 디자이너를 역임하기 전까지 벤틀리 디자인을 이끌었던 더크 반 브레켈(Dirk van Braeckel)은 “우리 목표는 럭셔리 SUV 계의 새로운 강자가 되는 동시에 기준을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브랜드의 다른 모델과 세그먼트가 다른 근본적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벤틀리의 전통이라 할 수 있는 ‘스포츠성’을 반영하는 것이 그들의 비전이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보다 진보적인 접근 방식을 펼쳤습니다.


EXP 9 F의 외관은 SUV답게 근육질 형태가 더욱 강조되었고 동시에 벤틀리의 우아한 캐릭터 라인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 있습니다. 또한 디자이너들은 이 컨셉에서 브랜드 특유의 순수함이 느껴질 수 있도록 각 면을 최대한 단순하고 정갈하게 디자인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과정을 ‘Hewn from Solid’라고 불렀습니다. ‘고체’라는 뜻의 ‘Solid’와 ‘모양을 다듬다, 잘라내다’라는 뜻의 ‘Hew’를 합친 것으로, 단단한 큰 덩어리를 조각하듯이 다듬으면서 디자인한 것입니다. 디자이너들의 진보적인 접근 방식은 헤드 램프에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기존 가로로 배치되는 4개의 램프를 SUV 프런트 면적에 맞게 세로로 배치한 것인데요, 메인 헤드 램프 옆에는 여분의 그릴도 추가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프런트 디자인에서 중요한 점은 기술적인 부분이 외관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것입니다. 프런트 범퍼에 위치한 2개의 주간 주행등은 램프 역할을 하는 동시에 터보 차져 V12 엔진 냉각을 위한 에어 인테이크 기능도 하고 있는데요, 터빈에서 영감받은 형태가 DRL 안쪽에 숨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터빈 형식의 디자인은 휠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습니다. 거대한 23인치 휠 속에 터빈 블레이드와 같은 스포크들이 촘촘하게 배열되어 있는데요, 추가로 중앙 휠 너트 잠금장치는 1920년대 르망에 출전했던 벤틀리의 모델들과 2000년 초반 르망을 휩쓸었던 ‘스피드 8’의 휠을 참고하여 제작되었습니다.

리어 램프 역시 전투기 엔진에서 영감받은 형태로 제작되어 전체적인 통일성을 높였으며 내부에서부터 빛을 내어 바깥으로 확산하는 방식으로 독특하게 설계되었습니다. 또한 머플러도 리어 램프 안쪽 그래픽과 같은 타원형의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리어 디자인의 내부를 보면 왜 EXP 9 F가 최고의 럭셔리 SUV 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트렁크가 하나의 패널로 이루어진 것과는 다르게, 이 컨셉의 테일 게이트는 2부분으로 분할되어 있습니다. 상-하로 열리는 트렁크의 핵심은 엄청난 개방감입니다.

특히 아래로 열리는 패널은 리어 램프 부분까지 함께 열려 공간 활용도를 극대화했으며 그랜드 투어링 SUV만의 다용도성을 제공합니다. 패널 안쪽은 실내와 같이 가죽으로 덮여 있어 럭셔리함을 높였으며 내부에는 식기들과 음료를 보관할 수 있는 여분의 수납공간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벤틀리만의 고급스러움은 실내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디자이너들은 새로운 세그먼트에 맞는 실내 디자인을 구현해 냈는데요, 이번 프로젝트에서 이들이 추구하는 바는 럭셔리함과 실용성이 모두 들어가 있는 인테리어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EXP 9 F의 인테리어는 목재, 가죽, 알루미늄 그리고 브론즈와 같은 전통적인 소재들이 사용되었지만, 매우 현대적이고 세련된 방식으로 연출되었습니다. 가죽은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사용되었는데, 첫 번째는 스크래치와 오염에 강해 내구성이 뛰어난 ‘소프트 터치(Soft Touch)’ 소재의 가죽과 두 번째는 시트를 감싸고 있는 등받이 부분과 수납공간 등에 쓰인 새들 가죽(Saddle Leather)입니다.

이 둘은 같은 가죽이지만 색상과 질감이 달라 큰 대비를 이루고 있고 시각적인 재미를 더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닥 시트는 양면으로 제작 되었는데, 평상시에는 실크 울 소재로 제작된 면을 사용하다가 등산 같은 야외활동 복장에서는 단단한 새들 가죽으로 만들어진 반대 면으로 뒤집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가죽이 다양한 방식으로 디자인에 사용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목재는 매우 간결하게 활용되었습니다. 바로 우드 패널을 중간에 끊김 없이 거대한 하나의 패널로 제작한 것인데요, 이 패널은 EXP 9 F의 대시 보드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또한 벤틀리의 전통적인 ‘황소의 눈(Bulls Eye) ‘이라 불리는 원형의 통풍구 역시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센터 콘솔은 사용자가 손쉽게 이용할 있도록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되었으며, 특히 손잡이 역할을 하는 프레임이 센터 콘솔과 디스플레이를 감싸는 형식으로 제작되어 실내 디자인의 안정적인 느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루프는 파노라마 유리로 덮여 있는데, 이러한 디자인은 랠리카의 롤케이지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뒷좌석은 아이패드나 태블릿을 통해 언제든지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어 비즈니스 용도로도 사용될 수 있으며 전동식 발판, 음료 테이블과 같은 다양한 편의 사항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더불어 시트 중앙 하단부에는 샴페인과 잔을 보관할 수 있는 미니 냉장 시설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트는 벤틀리의 특유의 다이아몬드 형태의 ‘퀼팅’ 패턴으로 마감되어 있으며, 사용하지 않을 때는 앞으로 움직여 더 많은 수화물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벤테이가의 모태가 되는 컨셉 모델, EXP 9 F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외-내관 모두 벤틀리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는 분명 새롭고 진보적인 디자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벤틀리 디자이너들 역시 자신들의 유산을 단지 유지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새롭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부분에서 새롭게 탄생한 EXP 9 F 는 8년이 지난 지금 봐도 여전히 세련되고 럭셔리한 느낌을 풍기고 있는데요, 이러한 탄탄한 모델이 바탕이 되었기에 벤테이가가 엄청난 성공을 거둘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세그먼트를 떠나 과연 벤틀리가 앞으로 어떠한 새로운 럭셔리를 선보일지 기대하며 오늘 글 마치겠습니다. 디자인 해부학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