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내연기관 시대에서 라디에이터 그릴은 자동차 디자인의 핵심 요소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각 브랜드들은 그릴을 통해 자신들의 뚜렷한 아이덴티티를 드러냈으며 멀리서 봐도 한눈에 브랜드가 인식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현재도 제네시스의 크레스트 그릴, 렉서스의 스핀들 그릴 그리고 아우디의 싱글 프레임 그릴 등 여전히 자동차 디자인에서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전기차가 내연기관 자동차를 빠르게 대체해가면서 점차 기능적인 필요성이 줄어가는 그릴의 존재여부가 자동차 디자인에 있어서 큰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이미 테슬라와 같은 신생 전기차 기업들은 완전히 그릴을 제거한 모델을 생산하고 있으며 현대 역시 45, 프로페시 콘셉트와 같은 차세대 전기 콘셉트에 그릴을 없앤 새로운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 그릴을 없애는 방향이 아닌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회사들이 있습니다. 벤츠는 차세대 EQ 콘셉트에서 이미 그릴의 디스플레이화를 이루었으며 벤틀리 역시 그릴을 조명과 같이 활용하고 있습니다. 기아 또한 이러한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릴이 필요없는 전기차 시대에서 이를 더욱 잘 활용하는 사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첫번째로 알아볼 브랜드는 메르세데스 벤츠입니다. 벤츠는 전기차 보급이 현재와 같이 대중화되기 전인 2016년 이미 제네레이션 EQ 콘셉트(Generation EQ Concept)를 공개하며 향후 자사의 전기차 디자인 발전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콘셉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전면 디자인이었습니다. 벤츠는 비록 기능적인 관점에서 그 필요성이 완전히 없어진 그릴이지만, 이것을 없애는 대신 최신 기술을 적용하여 한 단계 더 발전시켰습니다. 바로 그릴을 디지털화시킨 것입니다. 

벤츠는 이를 ‘일렉트로 룩(Electro Look)’이라고 불렀습니다. 고든 바그너 벤츠 디자인 총책임자는 “아방가르드한 동시에 현대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일렉트로 룩은 벤츠의 디자인 철학인 ‘감각적인 순수함(Sensual Purity)’의 재해석을 통해 탄생할 수 있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기존의 그릴의 형태는 디스플레이 내부의 LED라인으로 대체되었으며 중앙 로고와 로고를 감싸는 스트럿 역시 동일하게 디지털화 되었습니다. 

디지털 디스플레이는 그릴만 표현하는 것이 아닌 전면 전체를 감싸며 헤드램프와 하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릴, 리브와 동일한 색상의 긴 LED띠가 전면 디스플레이 전체를 감싸면 그 형태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차량 후면에도 동일한 블랙 디스플레이 패널과 LED 라인 적용되었습니다. 

EQ 콘셉트에서 선보인 디스플레이 디자인 방식은 이후 2017년 공개된 EQA 콘셉트, 2018년 공개된 비전 EQ 실버 에로우 콘셉트(Vision EQ Sliver Arrow Concept)에 그대로 적용되며 EQ 브랜드만의 고유 아이덴티티 요소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리고 이 디스플레이 디자인은 벤츠가 2019년 공개한 차세대 전기 플래그십 모델인 EQS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하게 됩니다. 벤츠는 블랙 패널 내부에 188개의 메르세데스 벤츠 로고 그래픽을 배치하여 마치 밤하늘 별과 같은 느낌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평면적인 패널에 새로운 깊이감을 더했습니다. 


 
또한 벤츠는 로고 그래픽 옆에 홀로그래픽 램프를 적용하여 새로운 일레트릭 룩을 완성했습니다. 홀로그램 램프는 다른 헤드 램프와 같이 고정되어 보이지만 사실 해당 그래픽이 2000RPM의 속도로 회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1 밀리미터 미만의 고성능 LED가 각각 개별적으로 작동하기에 가능했으며 해당 홀로그래픽 램프는 3가지의 다른 모드로 회전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알아볼 브랜드는 벤틀리입니다. 럭셔리 브랜드 중 하나인 벤틀리 역시 기존에 그릴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특히 벤틀리의 특유의 다이아몬드 퀼팅 패턴을 그릴 내부에 배치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브랜드들이 쉽게 흉내낼 수 없는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벤틀리도 전기차의 시대를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밴틀리는 2030년까지 내연기관 차량 판매를 금지하는 영국 정부의 정책에 맞춰 해당 년도까지 모든 차종의 전동화를 완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대중의 선망을 얻고 있는 브랜드인 만큼 전동화 시대에 모범적인 사례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 가운데 벤틀리는 작년 그들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동시에 앞으로의 비전을 제시하는 ‘EXP 100 GT’ 를 선보였습니다. 전장이 5m, 전폭이 2m가 넘는 대형 2도어 GT카의 성격으로 제작된 이번 콘셉트의 핵심 요소 중 하나는 바로 전면 디자인입니다. 

EXP 100 GT는 순수전기차임에도 불구하고 기존보다 더 커진 그릴이 탑재되었습니다. 원형 램프 역시 기존 4개에서 2개로 축소되는 변화를 거쳤으며 크기 또한 더욱 커졌습니다. 서로 물리적으로 맞닿아 있는 그릴과 헤드 램프는 다이아몬드 퀼팅 패턴을 통해 하나로 엮여 있습니다. 


 
특히 다이아몬드 퀼팅 패턴에 불이 들어오면 그릴과 램프과 동시에 발광하며 둘 사이의 경계는 더욱 희미해집니다. 이러한 파격적인 시도는 유명한 조명 디자이너인 ‘Moritz Waldemeyer’ 와 협업을 통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벤틀리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을 구상했다”라고 밝혔습니다.

또한 그는 벤틀리의 여러 클래식카 중 ‘Blower’와 ‘Blue Train’ 모델을 중점적으로 참고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두 모델의 공통적인 특징은 매우 큰 사이즈의 그릴을 탑재하고 있으며 측면에서 볼 때는 헤드 램프와 그릴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만 전면부에서는 그 둘이 마치 하나의 영역으로 교차하고 있는 듯한 그래픽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Moritz Waldemeyer는 이러한 그래픽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콘셉트 모델에 적용했으며 조명 아티스트답게 LED 램프로 그 둘의 시각적인 연결성을 더욱 강조한 것입니다. 

현재 EXP 100 GT의 새로운 조형미는 벤틀리가 비교적 최근 공개한 뮬리너 바칼라 모델에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비록 그릴과 램프과 서로 붙어 있으며 동시에 발광하는 콘셉트의 핵심적인 요소는 반영되지 못했지만 2개의 원형 램프와 2개의 직선 램프, 그리고 콘셉트와 동일한 범퍼 디자인이 적극적으로 적용된 것을 미루어 보아 향후 등장할 순수 전기 벤틀리 모델에 EXP 100 GT모델의 디자인이 대거 활용될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알아볼 브랜드는 기아입니다. 디자인기아 슬로건 아래에서 호랑이 코 그릴을 탄생시킨 기아자동차는 최근 2025년까지 약 9조원을 투자하며 2026년까지 전치가 50만대 판매를 목표로 하며 적극적으로 전기차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이러한 기아는 작년 두 대의 순수 전기차 모델을 공개했습니다. 바로 이매진 콘셉트와 퓨트론 콘셉트입니다. 우선 이매진 콘셉트는 회사 최초의 순수 전기 4도어 모델로서 니로의 하이브리드 모델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기아의 그레고리 기욤 디자인 부사장은 “이매진 콘셉트는 주행거리, 실용성과 같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관점 대신 매우 감성적인 접근을 통해 제작되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매진 콘셉트의 큰 특징은 기존 호랑이 코 그릴의 확대 적용입니다. 기존 차량에 중앙에만 위치해있던 호랑이코 그릴이 전면부 전체에 확대 적용되었으며 그 사이에 헤드램프가 들어간 기아의 새로운 전기차 디자인이 완성되었습니다. 

확대된 그릴 가장자리에는 LED 램프가 적용되어 그 형태를 더욱 뚜렷이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레이아웃은 기아가 2019년 말에 공개한 퓨트론 콘셉트에도 적용되었습니다. 퓨트론 콘셉트의 전면부는 이매진 콘셉트와 동일하게 호랑이코 그릴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그 내부에 헤드램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직선의 선으로 단조롭게 디자인된 이매진 콘셉트의 램프와 다르게 퓨트론 콘셉트에는 디자인을 더욱 다체롭게 해줄 스타 클라우드(Star Cloud)라는 새로운 매트릭스 LED 조명이 적용되었습니다. 밤하늘 성운에서 영감받아 제작된 스타 클라우드 조명은 기하학적인 형태의 패치워크가 움직이면서 작동하게 되며 전면부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을 표현해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전기차 시대에서 없어질 위기에 처한 그릴을 역으로 더욱 잘 활용한 사례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 브랜드의 새로운 작품을 살펴보니 전기차 시대에 진실로 필요한 것은 그릴을 없애는 대담한 시도가 아닌 그것을 더욱 잘 활용하기 위한 창의성과 독창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과연 콘셉트에서 적용된 새로운 디자인과 기술들이 머지 않아 양산 차량에 적용되길 바라며 오늘 글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