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은 사전적 의미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 관습, 행동 따위의 양식”을 뜻한다. 디자인 분야에서 전통은 곧 정체성으로 직결된다. 오랫동안 대중들에게 인식된 모습이 곧 현재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전통이 없는 신생 브랜드가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힘든 것도 정체성의 결여에서 온다. 오랫동안 타 브랜드와 차별화된 영역을 구축해 오지 않았기에 존재감이 가벼울 수밖에 없다. 전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하지만 오랜 전통이 발목을 잡을 때도 있다. 새로운 변화를 추구할 때는 더욱 그렇다. 전통이 오래될수록 보수적인 입장을 취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오랫동안 공들여 쌓은 탑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릴 수는 없는 법. 그렇기에 70여 년 만에 대변신을 선택한 이 브랜드의 용기 있는 결정에 절로 감탄이 나온다. 사소한 변화에 괜히 호들갑 떠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새로운 태어난 수준으로 변했다. 주인공은 바로 미국 스포츠카의 자존심 콜벳이다.


쉐보레는 2019년 8세대 콜벳을 출시했다. 차량이 공개되자 큰 논란이 일었다. 앞서 강조한 전통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 쉐보레는 1953년 출시한 1세대 콜벳부터 7세대까지 엔진이 앞에 놓이고 후륜으로 차량을 구동하는 FR 방식을 고수했다. 특히 코드네임 C2의 2세대 콜벳은 특유의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아직까지 회자된다. 두 부분으로 분할된 스플릿 윈도의 미감은 여전히 큰 여운을 준다. 물론 시야 문제로 1년 만에 새로운 디자인으로 변경됐지만.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긴 후드와 뒤 쪽에 위치한 운전석은 콜벳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 콜벳의 전통이 된 것. 그러나 70여 년 만에 정체성과 전통 모두 사라졌다. 변화의 폭은 상당히 공격적이었다. 사실상 다른 차가 됐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이쯤 되면 쉐보레의 결정에 의문이 든다. 이렇게까지 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들에게 지난 반세기 동안 공들여 쌓아 올린 전통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도대체 그들을 움직이게 한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정답은 8세대 콜벳 디자인을 총괄했던 톰 피터스Tom Peters의 인터뷰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과거를 고수하는 대신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에 투자하는 과감한 모험을 택했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사뭇 흥미롭다. 피터스는 8세대 콜벳을 두고 “10살 꼬마를 위한 차량”이라고 답했다.
아니, 성인도 운전하기 힘든 600마력 대 슈퍼카가 운전면허도 취득할 수 없는 어린 꼬마를 위한 차량이라? 조금 황당하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면 절로 납득이 간다. 피터스가 언급한 10살 꼬마는 미래를 상징한다. 사실 미국에서 콜벳의 구매 연령층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콜벳의 성장 과정을 함께한 베이비붐 세대보다 이를 경험하지 못한 밀레니엄 세대의 인구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 것.
피터스가 언급한 10살 꼬마는 곧 새로운 세대를 의미한다. 쉐보레는 젊어지는 구매층의 니즈를 자극할 만한 콜벳의 새로운 셀링 포인트를 찾아야만 했을 것이다. 아빠가 몰던 스포츠카를 그대로 몰고 싶은 젊은이는 없을 터. 쉐보레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고, 이렇게 등장한 것이 엔진이 가운데 위치한 미드십 구조의 8세대 콜벳이다.
피터스는 “우리는 새로운 고객을 원하고 전통에서 탈피하고 싶었다”고 말하며 70년 역사를 포기하는 것에 미련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어 “현재 고객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지만, 젊은 구매층을 확보하는 것 역시 중요한 사안이었다”고 답했다.
브랜드의 이미지를 제고하기로 결심한 쉐보레에게 시답잖은 변화는 필요 없었다. 이들은 대중을 한 번에 주목시킬 만한 강력한 변화가 필요했다. 설령 그것이 70년 전통에 위배된다고 해도 쉐보레에게 필요한 것은 미지근한 과거가 아닌 화끈한 미래였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은 혁신을 외치며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라”고 했다. 변화에는 고통이 따르지만, 고통 없이 성장할 수도 없는 법. 70년 역사를 저버린 쉐보레 콜벳의 미래가 오히려 기대되는 이유다.
글 / DESIGN ANATO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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